2020. 8. 14. 22:51ㆍ글쓰기/독후감
본서의 제목은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다. 독일의 파울 클레라는 화가가 천사를 그린 작품의 제목이며, 이 천사의 ‘시선’을 책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는 이 그림의 천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과거라고 한다. 기독교 신학과 진보적 역사철학의 시선은 진보를 외치며 미래를 향하지만, 이 천사는 폐허 더미들로 뒤덮여 있는 파국의 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천사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파괴된 것들을 모으고 싶어 하지만 진보라는 강력한 폭풍이 이 천사를 미래로 떠밀고 있다. “과거를 향한 그의 응시, 무너져 내린 잔해들과 그 속에서 고통 받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곧 역사를 바라보는 벤야민의 시선이다.” 진보라는 “폭풍은 천사를 미래로 떠밀면서 과거를 잊으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천사는 떠밀리면서도 과거를 응시하는데 이는 망각에 저항하는 것이다.
책의 1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섭리 속에 계시되는 역사, 2장은 맑스: 역사적 유물론과 해방서사의 등장, 3장은 벤야민: 지금 여기, 억눌린 자들의 메시아이다. 저자는 1장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대-기독교적 역사관과 2장의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서구 역사철학은 유대-기독교 메시아주의 전통의 구원론적-종말론적 역사관과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해방서사로서의 역사관의 대립으로 전개된다. 이는 “역사를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의 전개 과정이면서 동시에 해방을 향한 그들의 몸짓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제공”(9)한다. 한편 유대-기독교 메시아주의 전통의 ‘이중적 전제’가 역사적 유물론에 반영되어 있는데, 이 “이중성이란 이 사유가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과제를 제시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 과제가 오로지 역사의 종말 또는 최종 목적의 실현이라는 미래의 시점으로 이월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완성되는 유대-기독교적 종말론은 창조-타락-구속-종말로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관이며, 현재 행복을 미래에 임할 메시아의 재림과 부활 이후로 지연시키며 그 시간을 기다리며 살게 하여, “역사적 과정 속에서 희생되는 자들, 고통 받고 억압받는 자들의 관점이 소실된다”는 문제가 있다.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섭리, 계획)이 있다”라는 말을 통해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며 신이 보장하는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며 참고 견디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세속국가, ‘지상도성’을 결코 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선을 참칭하는 지배자들의 무리라고 비판한다. 반면 역사의 종말 이후 이를 대체할 ‘천상도성’, 즉 천국이 실현될 것이다. 지상도성은 권력이 인간의 욕망을 낳고 타락시켜 결국 선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신국(천국)은 선이 완전하게 실현되고, 갈등과 적대가 종식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오병이어 기적이 보여주듯이 공통의 음식을 먹으며 노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함께 안식과 평화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때가 도래할 것이다.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구원이라는 메시아적 사건은 반드시 역사의 ‘외부’에서만 발생하는가.(7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불의와 고통을 설명하며 선한 신을 변호하는데(변신론) 심혈을 기울였으며, 세속적인 해방으로는 고통은 극복될 수 없으며 초월적인 구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체계화한 기독교 종말론 역사신학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불의와 억압, 폭력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세의 고통 받는 사람들, 억눌린 자들을 ‘위로’하지만, 그들의 구원이라는 사건을 역사의 ‘종말’ 이후로, 즉 ‘먼 미래에’ 벌어질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로 미룸으로써,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지금 여기’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신학으로 생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등장한 것이 20세기 해방신학이었다. 20세기 중후반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가톨릭 해방신학은 당시 독재자들로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자들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하고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에게 해방은 구약에서 출애굽과 이스라엘 해방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의 창조에 필적하는 사건으로 인식되어야”한다. “통치자들을 왕조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비손으로”(누가1:52-53) 따라서 그에게 억압받는 사람들은 해방의 역사적 주체가 된다.
“역사의 미래는 가난한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것이 될 것이다. 참다운 해방은 압제받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루는 업적이 될 것이다. 주님은 그들 안에서 역사를 구원하실 것이다. 해방의 영성은 아나빔(야훼의 가난한 이들)읜 영성을 기반으로 살게 될 것이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야기한 공백, 즉 구원을 내세로 미뤄 현실의 고통에 무기력한, 또한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이 공백을 인식하고 메꾸기 위한 시도를 했던 것이 해방신학이었다고 정리한다. 한편 보론에서 현대 공산주의 사상이 기독교적 ‘공동선’의 이념의 세속화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초대교회 공동체와 타락한 중세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등장한 수도원 정화 운동(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등), 그리고 중세 교회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도시 공동체 등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2. 맑스: 역사적 유물론과 해방서사의 등장
맑스-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이러한 유대-기독교적 역사관에 반기를 들어, “역사를 목적의 실현 과정이 아니라,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역사적 유물론이 첫째로 “기독교적 공동선의 이념이 지속적인 세속화를 거쳐 형성된 근대 코뮨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있”으며, 둘째로, “계몽주의의 결정적 영향 속에서 역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이때 부지불식간에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의 요소들이 역사적 유물론에 체계에도 스며들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근대 진보 역사관에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이 남아있게 되었는가? 저자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콩도르세와 ‘역사 속의 신’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는 헤르더, 칸트, 헤겔의 철학을 검토하면서 이성을 가진 인간의 역사가 자유를 향해 진보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적대와 갈등, 폭력은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는 세속화된 ‘섭리론’을 펼친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중세 신학을 비판하며 이성을 기치로 주창한 “계몽주의적 진보사관은 독일 역사철학에 이르러 이렇듯 역설적인 방식으로 신학적 사유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세계의 탈주술화를 내세웠던 근대 계몽주의는 진보사관이라는 형태의 세속화된 신학적 역사관에 거꾸로 역사를 섭리의 신비로 포장했다.”(116)
청년기 맑스의 소외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소외되기 전 인간은 공동체적이고 자연친화적이었으나(에덴동산) 그곳으로부터 소외당했으며(추방) 완전한 인간적 인간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해방(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기독교 메시아주의적 역사관의 사고방식의 잔재가 발견되며, 세계의 창조자인 인간이 노동을 통해 그 본래적 본질을 실현할 것이라는 근대적 노동 개념, 그리고 이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독교적 노동윤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비판한다.
부르주아들의 성장으로 인해 지구 전체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편입되며, 자급자족은 불가능해지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새로운 시대에서 맑스는 성경을 이렇게 패러디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 계급은 그 자신의 고유한 형상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이 창조주는 새로운 창조주인 프롤레타리아에게 죽은 운명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기독교의 메시아주의적 종말론(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부르주아 파멸), 역사의 의도하지 않은 귀결(부르주아의 의도치 않은 프롤레타리아 성장 초래 및 물질적 토대 구축)을 통해 저자는 기독교, 계몽주의적 역사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3. 벤야민: 지금 여기/ 억눌린 자들의 메시아
벤야민은 위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맑스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중단’이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메시아적 힘을 발견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관건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이동이다. 즉 앙겔루스 노부스라는 천사가 바라보고 있는 것, “그 시선은 역사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 즉 쓰러져간 사람들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기독교 신학적 개념인 메시아 개념을 세속화하여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주창한다. 이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중단이라는 사건을 의미하는데 기존 질서를 중단시키고 새로운 사건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반대되는 개념, 즉 적그리스도는 당시 히틀러와 파시즘이었다.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메시아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기독교 시간관과 계몽주의적 시간관이 직선적 역사관을 주장하는데 반해 벤야민은 역사는 진보가 아니라 반복이라고 일갈한다. 과거는 지나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과거의 반복이기에 우리에게는 ‘현재화’가 필요하며, 이 ‘현재화’의 의미는 현재에 드러난 과거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을 말한다. 벤야민이 목격한 역사의 반복은 프랑스의 위대한 혁명들이 반복적으로 황제와 군주를 옹립하는 낡은 제도로 복귀하는 사건들이었다. 이렇게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는 그에게 파국을 의미했다. 또한 ‘나중에’ 도래할 진보 혹은 천국을 기다리라는 태도는 현재의 반복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그때 시간이 중지되는 사건을 통해 메시아적 사건이 찾아온다. 당시 사람들의 소비생활과 백화점과 만국박람회 등 문화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 삶(환상)에 취한 사람들을 꿈에서 각성시키는 것이 그에게는 역사의 중지였다. 기술 발전과 역사의 점진적 발전이 아닌 한 순간의 꿈으로부터의 각성 그리고 도약이 필요한 것이다.
벤야민은 억압받고 고통 받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진보가 아니라 파국의 과정이었으며, 앙겔루스 노부스의 천사가 응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과거에 희생된 자들을 기억하고 현재를 극복할 힘을 얻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고 한다. 그것이 실행되는 때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뒤얽혀 시간의 직선적 흐름을 깨버리면서 미래로 도약하는 순간인 ‘지금시간’이다. 이 시간이 구원 가능성의 시간이며 예측 불가능한, 열려 있는 우발적 시간,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이다. 즉 모든 시간은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정치적 메시아론이 다른 진보적 역사관과 다른 지점은 이러하다. 다른 역사철학들이 반복되는 역사적 비극들이 나중에 해결될 것이라고 지연시킴으로 인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반해 벤야민의 ‘지금시간’ 이념은 억눌린 자들이 ‘지금 여기’ 겪고 있는 고통의 구체적 형태들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단순히 미래를 관조적으로 기다리는 개념이 아닌 지금시간에 메시아적 도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시도하라는 것이다(여기서 메시아적 도래는 종교적 개념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자(예수의 재림)이 아니라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이들이 이룩할 자기해방을 말한다).
벤야민이 역사를 통해 목격한 히틀러와 파시즘에서 공통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 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예외 상태’를 선포하며 자신들을 초월적 권력의 소유자인 메시아로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억압받는 자들이 파시즘에 맞서 일상적 규칙이 된 예외상태의 지배를 넘어서는 “진정한 예외상태”를 창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규칙이 된, 반복에 불과한 지배를 중단시키기 위한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것을 뜻했다.”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모든 정사(正史)는 지배층들의 역사이고 그 가운데 고통 받고 희생된 자들의 한과 곡소리는 생략되어 있다. 벤야민이 주장하는 바는 고통 받는 자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그 고통(부정성)을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되, 섭리의 믿음이 아니라 역사적 고통의 극복을 위한 현재의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메시아를 바라보는 시선”, 즉 “세속화된 부정신학으로서의 비판적 철학은 구원된 상태(미래에 대한 청사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구원의 희망을 보존하려는 시도”이다.